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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승호 일가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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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승호 일가 암살 사건은 1874년 민승호와 그의 가족이 사망한 사건이다. 고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해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한 후 민승호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고, 이후 의문의 폭발로 민승호와 그의 가족이 사망했다. 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신철균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관련자들의 과도한 처벌과 명성황후 세력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민승호는 충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민영익이 양자로 입적되었다. 1892년 운현궁 폭탄 테러가 명성황후의 보복이라는 주장도 있다.

2. 사건의 경과

1874년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해 고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3] 민승호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3]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5]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하여 국문 후 처형했다. 이 자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1876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신철균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다시 체포하여[5] 국문했다.

2. 1. 폭발 사건 발생

1874년 음력 11월 28일 신원을 알 수 없는 승려가 민승호에게 선물이라며 진상품 상자를 전달했다.[2] 민승호는 수재 중이었기에, 산승을 불러 아들을 위해 조용한 곳에서 기도를 드리게 하고 있었다.[3] 이날 들어온 함은 기도가 끝난 뒤에 열어보려 했으나, 함을 전달한 사람이 이미 돌아가 민승호는 의심했다.[3] 기도가 끝나고 민승호는 밀실로 함을 옮겨 혼자 살폈는데, 함에는 구멍이 있었고 자물쇠와 열쇠가 걸려 있었다.[3] 민승호가 무심코 함을 열려고 하자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3]

이 상자 안에는 폭발물이 들어있었고, 개봉 과정에서 폭발하여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 등이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2] 당시 민승호의 아들은 10세였고, 할아버지(민치구[3])와 함께 서 있다가 변을 당했다.[4] 민승호 역시 온몸이 시꺼멓게 타서 말 한마디 못하고 죽었는데, 죽을 때 운현궁을 두세 번 가리켰다고 한다.[1]

2. 2. 흥선대원군 배후설

민승호는 죽기 직전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을 두세 번 가리켰다고 전해진다.[1]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끝내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1] 명성황후 역시 흥인군 방화 사건 등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하고 원망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1]

3. 수사 및 재판 과정

1874년경복궁 화재로 고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같은 해 11월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원군이 배후로 지목되었다. 민승호는 외부에서 온 함을 열어보려다 폭발로 즉사했는데, 죽기 전 운현궁을 가리켰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고종과 민비는 대원군을 원망했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1][3]

때마침 흥인군의 저택에도 방화 사건이 발생했는데, 민비는 대원군이 흥인군에게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 비밀 조사 후 신철균의 문객 장씨가 체포되었으나, 신철균은 대원군의 문하에 있었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1]

3. 1. 신철균 체포와 처형

1875년 11월 의금부는 용의자로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었던 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 장씨를 체포했다. 장씨는 국문을 받고 처형되었고, 신철균 역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5]

1876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5] 신철균의 처음 이름은 신효철로, 1866년 영종도 첨사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해군 수백 명을 살해한 공로로 진주병마사로 특진하였다. 1874년 이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방술을 좋아해 잡객들의 출입이 많았다.[6]

결국 신철균은 세 번의 화재사건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고 대역죄로 몰려 참형을 당했고, 그의 집은 몰수되었으며 부녀자들은 먼 곳으로 옮겨져 노비가 되었다.[6] 80세 고령이었던 그의 장모는 고문을 받다가 장살되었고, 그의 친부모와 형제, 아들들 역시 참수형을 당했다. 운현궁의 하인들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모두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3. 2. 재판 과정의 의문점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또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5] 의금부는 용의자로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인 장 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장 씨는 처형되었고, 신철균 역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고종과 명성황후1876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5] 심문했다.

신철균은 1866년 인천 영종도 첨사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해군 수백 명을 살해한 공로로 진주병마사로 특진한 인물이었다. 1874년 이후 관직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방술을 좋아해 잡객들과 교류가 많았다.[6] 그의 장모가 흥인군 집에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화재가 발생하면서 장모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신철균 또한 죄는 없으나 무복(죄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형을 사는 것)을 당했다. 결국 신철균은 세 번의 화재 사건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고 대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으며, 그의 집은 몰수되었고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6]

80세 고령이었던 그의 장모는 형문을 받다가 사망했고, 그의 친부모와 형제, 아들들 역시 참수형을 당했다. 운현궁의 하인들 역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모두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명성황후 세력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무리한 수사를 강행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4. 사건의 여파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민승호는 아들이 없어 민영익을 양자로 들였다. 1892년 운현궁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는 명성황후흥선대원군을 의심하여 일으킨 보복이라는 주장이 있다.[2]

4. 1. 민영익의 양자 입적

민승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명성황후는 촌수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도록 했다.[7] 민태호는 이를 반대했으나, 그의 동생 민규호가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라며 형을 설득했다. 결국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이후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7]

4. 2. 1892년 운현궁 폭탄 테러와의 연관성

일각에서는 1892년운현궁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가 민승호의 죽음이 흥선대원군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 명성황후의 보복이라는 주장이 있다.[2]

5. 사건에 대한 평가 및 해석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어야 평가 및 해석 섹션을 작성하고, 그 결과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참조

[1]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2]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3]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4]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5] 간행물 고종실록 1876-02-14 #고종 13년
[6]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7]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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